혁신·승부사 기질, 글로벌 삼성 이끌어(종합)

탑뉴스
혁신·승부사 기질, 글로벌 삼성 이끌어(종합)
‘재계 거목’ 이건희 회장 별세…반도체·휴대폰 세계 1위로 키워
  • 입력 : 2020. 10.25(일) 15:35
  • 김부삼 기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이후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사진은 2010년 CES 2010 참관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이 회장은 지난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故)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 후 어린 시절 부친의 고향인 의령에서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부친인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대구에서 '삼성상회' 운영에 전념하느라 자녀를 돌볼 여력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호암이 이건희 회장을 만나는 일은 일년에 한두 차례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은 할머니를 어머니로 오인할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여섯 살 무렵 서울 혜화동에서 온가족이 함께 살게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온가족은 다시 흩어졌다.
전쟁을 거치며 우여곡절 끝에 그는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를 다녔다. 5학년이던 1953년에는 부친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이 회장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1965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고, 1966년 9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이 회장은 학창 시절에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말을 하기 시작하면 쉽게 반박을 하기가 어려운 수준의 지식과 논리를 쏟아내 동기생들을 당황스럽게 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말을 하기보다는 깊이 생각한 뒤 쏟아내는 스타일이다. 이 회장은 일본어에 능통했고, 다방면에 해박했다는 평가다.
그는 학창 시절 때때로 동기생과는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내놓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예컨대, 외자 유치, 일자리 창출, 기업의 이익창출의 중요성, 인재의 중요성 등 세상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이 회장이 삼성 경영 일선에 뛰어든 것은 1966년 9월이다. 이 회장은 그해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됐다.
그는 평소 사장단회의에서 말을 별로 하지 않았으나, 한 가지 사안에 대해 따지기 시작하면 상대의 밑천이 드러날 때까지 몰아세웠다. 아침에 시작한 회의가 밤까지 이어지거나, 한 사람을 상대로 마라톤 질문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의 어법은 간단하다. 그는 "왜?, 그래서, 그런데…" 라는 식으로 끊임없는 질문 공세를 펴서 본질을 찾는 식이었다. 이런 질문 공세 속에서 본질을 파악하는 동시에 창조적 생각까지 이끌어내는 게 그만의 대화 스타일이다.
이 회장은 남을 속이거나 비난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을 좋아했으며 그 자신도 정직을 생활의 신조로 삼고 있다. 이 회장은 과거 세탁기 뚜껑 불량 등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사례에 대해 강하게 질타했다.
특히 불량품이 있는데도 보고하지 않은 경영진의 무사안일과 거짓보고에 대해 질책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 회장의 성격 중 두드러진 부분은 조용하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강력한 리더십이다. 젊은 시절부터 현재까지 잃지 않는 침묵 속에서 배어나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승부사 기질로 거함 삼성을 흔들림 없이 항진하게 만든 원동력이라는 분석이다.
이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으나,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제 사재를 보태겠다"고 적극 나서 1986년 메가 D램을 생산해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이어 ‘가족 빼고 모두 바꾸자’는 신경영 선언을 한 이후 휴대폰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985년 마침내 애니콜은 전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였다.
또 일찌감치 학력보다 실력 위주로 채용했던 점도 눈에 띈다. 1995년 이 회장은 "대학 졸업장과 관계없이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동일하게 주고 입사 후 승진, 승격에도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삼성의 입사 기준은 학력이 아니고 실력입니다"라고 선언하고 입사시험을 실시한 것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과감히 없애도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87년 취임 초부터 여성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회장은 여성들이 육아 부담 때문에 마음 놓고 일하지 못하는 현실에 주목해 어린이집 사업을 현실화했다.
이 회장은 IOC 위원으로서 스포츠를 국제교류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촉매제로 인식하고, 1997년부터 올림픽 TOP 스폰서로 활동하는 등 세계의 스포츠 발전에도 매진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꾸준히 스포츠 외교 활동을 펼쳐, 201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평창이 아시아 최초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삼성그룹을 세계적인 그룹으로 도약시킨 이 회장은 2014년 5월 10일 오후 자택에서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을 받았고, 이후 계속 삼성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김부삼 기자 kbs6145@naver.com
<저작권자 ⓒ 수도권일보 (www.sudokwo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