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가는 길 안수형 | 시인 @sudokwon.com

2024년 09월 09일(월) 14:57

하늘은 청명했다. 대지의 아침공기는 미세먼지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상쾌했다.

이런 자연환경에서 부모님과 조상님 산소를 벌초한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좋은 날 회사 창립기념일이라니, 의욕이 솟구쳤다. 주말까지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도무지 여유시간 마련하기가 어려웠는데, 오늘은 하늘이 내려준 의미 있는 날이 아니겠는가. 지인으로부터 농업기술지원센터에서 예초기(刈草機)를 대여 해 준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절차라든가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농업기술지원센터 담당자에게 농협에 가서 보험과 회원가입만 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가까운 농협에 들렀다. 농협에서는 몇 가지 준비서류를 이야기하면서 오늘 중으로는 어렵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내려준 날이 언제 또 있을까. 한참 망설이다 농사일을 하고 있는 동네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친구는 전화를 받자 반갑게 맞으며 어떤 일로 내려왔느냐며 물었다. 추석이 가깝고 오늘 쉬는 날이어서 벌초를 하러 왔다고 말하고 둘은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농업기술지원센터와 농협이야기를 했고, 친구는 행정기관은 최소한의 확인절차만 이행하고 행정을 간소화해야 하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를 이행해야 한다면 행정의 신뢰가 떨어지고 국민들은 불편해서 이용을 기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공공 행정기관에서 국민의 편익을 도모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이용절차가 까다롭고 극히 제한적이라면 국민의 이용률이 저조할 수밖에 없다. 행정절차를 간소화하여 많은 국민이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친구는 ‘보유하고 있는 예초기가 있으니 걱정 마’라고 했다.

조상님을 모시는 추석이 다가오면 많은 국민들이 조상님을 찾아 나선다. 조상님의 묘는 고향에 두고 형제들과 친척들은 직장 등 삶의 여건에 따라 타 지역에 또는 해외에 살고 있는 국민들이 짧은 일정으로 찾아 벌초를 한다. 벌초는 단순히 풀을 깎는 일만이 아니다. 조상님께서 어렵고 힘든 역경과 고초를 겪으며 우리들을 키웠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분들의 삶에 존경과 예를 표하고 우리의 삶에 그 가치를 실천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 만 해도 낫을 보자기나 신문지에 둘둘 말아 가져와 팔을 걷어붙이고 추석 당일이나 하루 전에 벌초를 했다. 그러나 예초기가 보급되면서 편리해지긴 했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쓰기 위해 구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기름을 치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관 장소도 마땅치 않다. 이래저래 구입이 어려운 것은 차치하고 농업기술지원센터에서 대여할 수 있는 행정절차를 간소화 했으면 좋겠다. 농업에 적을 두고 있으면 좋겠지만, 삶의 환경이 급속하게 변해가는 요즘 농사일을 하다 이직(移職)이나 전직(轉職)하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이다.

아무튼 친구는 예초기를 우리 조상님이 계시는 곳에 갖다 주고 마치면 연락하기로 하고 자리를 떠났고, 나는 예초작업을 했다. 두 시간 가까이 걸쳐 예초를 마치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곧 도착했고 시계를 보니 오후 12시 40분. 나는 친구에게 점심을 대접하려고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다. 그러나 친구는 일꾼들과 함께 참깨 밭에서 밭을 매다 점심때가 되자 식당으로 안내하고 왔으니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고마워 그래도 때가 지났으니 점심 먹고 가면 안 되겠느냐고 한 번 더 물었으나 친구는 다음 기회에 먹자고 한다. 처음에 전화했을 때 바쁜 기색을 하지 않아 몰랐지만, 친구가 바쁜 날 온 거 같아 미안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친구야! 다음 기회에 꼭 은혜를 갚을게’ 다짐하고 형님 집으로 향했다.

거동이 불편한 형님은 작년까지만 해도 벌초도 하고 농사일을 했지만 올해부터는 할 수 없었다. 형님 내외분은 미소 띤 얼굴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수고 많았어!”하는데 수십 년 축적된 과거 시간이 한 순간에 지나가고 숙연해지며, 부여잡은 손에 힘이 빠지며 발걸음이 역 쪽을 향해 재촉했다.